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 내 삶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는 것.

2012. 8. 15. 17:04Diary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계심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머지않아 비관론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일어나는 좋지 못한 일들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며 모든 일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선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

로버트 모리스, <<꿈을 좇을 때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시험>> 중 발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심지어 나쁜 일들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그 분의 목적을 달성하시는데 그 모든 일들을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이다. 혹시 나의 말을 듣고, "내게 일어난 이 나쁜 일들이 단지 그 분의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그럼 하나님이라는 분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내게 이런 나쁜 일들을 주셨단 말이야?! 하, 몰랐었는데 참 이기적인 분이군!"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그 이기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깊은 평안과 세상의 요구 속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중심을 잡아주시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로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다.

  (당신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분께 찬양하는 것이 포함되어있는데 이것은 종교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스스로 이 세상에 오지 못하였고, 누군가에게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를 만든 그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도록 시스템화 되어있다. - 오해하지말자. 시스템화 되었다는 말은 결코 자동화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선택할 수 있게 해주셨다. 따라서 당신은 가장 기쁜 삶을 누리기 위한 방법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신학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틀렸다. 나는 지금 '사람의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만일  위와 같은 얘기를 해놓고 그것이 단지 이야기(이론)로만 그친다면 나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고리타분한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난 사람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한 소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살았다. 아버지로부터 독보적인 편애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다. 자신이 늘어놓는 자랑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상처를 줄지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이 소년을 재수없게 생각한 형제들은 서로 모의한 끝에 이 소년을 죽여버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막상 실행을 앞두자 그들은 무서워졌는지, 그를 직접 죽여버리는 대신 땅 속에 구덩이를 파서 가둬버리기로 작정한다. 어찌되었건 그 소년은 죽겠지만, 자신들이 직접 돌로 쳐 죽이는 것보다는 덜 끔찍하고 죄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소년은 자기의 형제들에 의해 흙 구덩이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런데, 때마침 그들 옆을 지나가는 인신매매단이 그 형제들의 마음을 바꾸었다. 한 형제가 인신매매단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제안했다. "죽여버리지말고, 팔아버리자. 죽이면 우리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돈 몇 푼이라도 받는게 훨씬 좋지 않을까?" 전부는 아니었지만, 다른 형제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그 소년을 인신매매범에게 팔아버렸다.

 그 소년은 팔려갔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도 아니고, 아주 저멀리 외국으로 팔려갔다. 그리고 해외 고위관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노예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아주 큰 사랑을 받았던 그 소년이, 며칠 새 가장 하찮은 신분인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소년에게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혹은 그 나라에 자기 국적으로 된 대사관이라도 한 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울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 소년은 아주 어려운 결단을 한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 맡겨진 일들을 해나간다. 그의 성실성을 유심히 지켜본 고위 관료이자 그의 주인은 그를 그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담당하는 총 책임자로 임명한다. 아참.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는 굉장히.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제와 이 사실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점에서 그의 잘생긴 외모가 그의 인생을 아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하면, 그 고위관료의 아내가 그 청년의 외모에 반해버렸다! (난 지금 막장드라마의 대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난 한 사람의 실제 삶을 토대로 이 글을 적어나가고 있다.) 주인의 아내는 매일 그를 훔쳐보았다. 그냥 보고 만족했으면 될 것을, 혼자 야릇한 상상을 했다. 에휴. 그냥 상상만 했으면 될 것을 결국 참지못한 아내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잠자리를 청한다. 그 청년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 집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주인의 집에서 그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아내만큼은 얘기가 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계산하고 따져볼 새도 없이 그는 도망쳤다. 옳지 못한 상황 속에서 피해버리는 것.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쌓아왔던 모든 성취들을 걸고 결단하였고, 도망침으로써 그 결단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진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주인의 아내는 오히려 그 청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자신의 남편에게 그 청년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모함한 것이다. 청년이 도망갈 때 주인의 아내 손에 들리워져있던 청년의 외투가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겁탈하려고 했다니.. 그 청년은 어이가 없었다. 단지 어이가 없었다기 보다 그는 자신의 그 결단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는 것 뿐 아니라 아주 시체가 되어 쫓겨나갈 판이 된 것이다. (그 나라의 법규 상 유부녀, 그것도 고위관료의 아내에 대한 겁탈에서 그를 살아남게 할 안전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그를 잘 알았다. 그의 성실함을 신뢰했다. 동시에 그 아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죽이는 대신 자신의 권한 내에 있는 지하감옥으로 그를 가두어 버린다. 그 청년은 천만다행(?)으로 감옥을 간다. 그러나 모함으로 인해 간 감옥이니만큼 천만다행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그는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들을 어디에 하소연할 때도 없었다.

 그 청년은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그는 예전 노예로 팔려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이 상황을 다시 한번 받아들이기로 결단한다. '그래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하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 감옥에서도 자신이 맡은 소소한 것들에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뭐 그리 많고 대단한 것이었겠냐마는, 그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서 자신이 져야하는 모든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가끔씩 맡겨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이전 자신의 주인의 눈에 들었던 것처럼, 다시 간수의 눈에 들게 된다. 그 간수는 그를 주목했다. 이득고 기회를 보아 그에게 감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죄수들을 관리할 책임을 맡긴다. 그는 여전히 성실했다. 그러한 성실함으로 그는 감옥에서의 여러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신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때는 감옥에 온지 11년이 되던 때, 그는 새로 들어온 죄수 두 명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어떤 죄목으로 이 곳에 들어왔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는 감옥 관리인으로서의 맡겨진 책임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들의 방에 간 그는 두 죄수의 얼굴 빛이 좋지 않음을 직감한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두 죄수는, 사실 각자 지난 밤 어떤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일반적인 꿈과는 달리 너무나도 생생하고 희한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꿈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궁금해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그는 불현듯 그 꿈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가 꿈을 해석한 바에 따르면, 한 사람은 3일 내로 죽게 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3일내로 복직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3일 내로 복직하게 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설명하고, 복직되거든 꼭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3일 뒤, 그의 해몽은 신기하게도 들어맞는다! 한 사람은 죽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복직된 것이다. "그래! 이제 나도 풀려날 수 있어!"

 그는 자유를 기대했다. 드디어 그의 인생에도 자유라는 희망의 빛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그 복직한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얘기해주고, 그 얘기가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그는 드디어 11년간의 옥살이를 청산하고 자유의 몸으로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매일 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감옥에 나가면 무얼하지? 그래, 일단 집으로 가야지! 그곳엔 나를 끔찍히도 아끼던 아버지가 계시니... 아니야. 나를 죽이려했던 형들도 있을테지. 내가 살아돌아온 것을 알면, 다시 날 죽이려 할지 몰라... 아, 난 어쩌지. 대체 어디로 가야하지...' 갈 곳이 없어 고민을 하다가도, 다시금 '자유'라는 단어에 생각에 미치면 그는 다시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 그 얼마나 꿈꿔왔던 것인가. 이제 곧 나도 자유를 누릴 수 있어. 나는 자유인이 되는거야!!' ... 그런데 이상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고, 또 일주일이 지나도. 한달이 지나고, 또 한달이 지나도!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닌 특유의 결심으로 그는 다시 상황을 받아들이고 만다. 만 2년이 지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밖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그를 찾았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그들에게 끌려갔다. '해방인건가? 2년 전 그때 그 사람이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일까?' 라는 희망찬 생각과 '아니야.. 이들은 날 죽이려 할지 몰라.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저 무시무시한 표정을 좀 봐'라는 절망적인 생각들이 그 짧은 찰나에 수십번도 더 반복되었다. 멋없이 자란 투박한 수염이 정돈되고, 오랜만에 쥐어보는 질좋은 원단의 옷을 입은 그가 끌려간 그곳. 그곳은 그 나라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그 나라의 상징. 왕의 앞이었다.

 왕 앞에선 그는 여전히 죄수였다. 영문을 모른 채, 그는 바닥에 업드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그러나 조금은 차가운 궁전의 바닥에 떨어뜨린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왕은 그를 불렀다. "자네..." "한 사람의 말을 듣자하니, 자네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하던데 내 꿈을 들어볼텐가. 이 궁전은 커녕, 이 나라의 어떤 사람들도 해석하지 못해 내 심히 답답하던 참이네." 그의 짧막한 대답이 있은 후, 그 왕은 말을 시작했다. "꿈에서 나는 강가에 서있었네. 가만 보니 살이 오르고, 멋진 소들이 물에서 나와 갈대밭에 가더니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었네. 아, 그리고 그 살오른 멋진 소들은 정확히 일곱 마리였었네. 그런데 말일세. 조금 지나지 않아,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뼈가 앙상히 드러나고, 흉악하게 생긴 소들이 그 멋진 소들을 잡아 먹는 것이 아닌가. 그 멋진 소들을 잡아먹고도 여전히 메마른 그 끔찍한 생긴 소들 역시 일곱 마리였었네. 자.. 내 꿈 이야기는 끝났네. 어떤 의미가 담겨있겠는가." 왕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답없는 침묵' 혹은 '죄송하다는 대답'을 당연스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있게 입을 떼었다. "왕이여. 그 꿈은 앞으로 왕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는 꿈입니다. 일곱 마리의 소들은 각각 7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며, 처음 살찌고 아름다운 소들은 이 나라에 찾아올 풍년을, 메마르고 흉악하게 생긴 소들은 이 나라에 있을 끔찍한 기근을 의미합니다."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왕을 향해,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왕이여. 그러니 왕은 이제 똑똑하고도 지혜있는 자를 찾아 이 나라를 지혜롭게 관리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또한 여러 담당 관리들을 두어서 이 땅에서 거두어지는 모든 곡식들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들이고, 별도의 창고에 잘 저장해놓도록 명령하셔야 합니다. 그렇게하여 7년 동안의 풍년을 관리하고, 7년 뒤 있을 흉년에 대비하신다면, 이 땅이 흉년으로 인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더욱 더 크게 놀랐다. 그는 꿈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왕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지났다. 그가 제안했던 '똑똑하고 지혜있는 자'의 위치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단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개 죄수였던 그가. 불과 2년 전만해도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의 거처를 고민했을 그가. 불과 13년 전만 하더라도, 고위 관료의 노예로서 허드렛일을 도맡았던 그가. 이제 자신의 나라도 아닌, 당시 최강대국의 반열에 있던 이집트에서 '총리'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의 이름, 요셉. 그는 그에게 닥쳐오는 매순간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믿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을 이정표로 삼았다. 아무리 끔찍한 일들이 그를 찾아와도 그는 자신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알았고, 모든 시련들이 결국 '목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될 것을 믿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는 안 것이 아니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아는 자는 없다. 다만 믿는 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인생역전 스토리에 주목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시련에 대한 그의 태도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그가 총리가 된 이후의 삶에서 나타난다. 때는 그가 총리가 된 지 7년 후, 즉 그가 예언했던 7년간의 풍년이 모두 지나고, 7년의 흉년을 보내고 있을 즈음이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로서 흉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간은 실제로 자기 삶의 목적이라고 믿었던 일의 성취여부를 평가받을,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가 총리의 지위를 얻긴 하였지만 만일 이 끔찍한 흉년 중에 그 간 모아두었던 곡식들이 다 고갈되어버린다면, 만에 하나라도 곡식창고에 불이나 모든 곡식들이 소실되어 버린다면, 그래서 결국 나라가 누란지세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에게 주어진 '총리'라는 지위는 일개 감투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더욱 심하게는 왕의 분노를 사 죽음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기도 했다. 바로 그 때, 이 중요한 시기에 그를 찾아온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그의 형제들이었다. 그의 인생, 모든 시련의 시작점이 되었던 형제들. 그 형제들을 앞에 놓고, 아버지가 살아계시냐는 등의 질문과 몇 차례 평가을 거친 후, 그는 원망할 법도 한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힌 뒤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지도 마시구요. 제가 그 이후에 겪었던 그 모든 시련들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으로 향하는 과정이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자신을 죽어려고 구덩이를 가두었던 형제들, 끝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그가 무소불위의 권위로 그들을 처단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래도 그 덕분에 출세했으니...^^v'라는 얄팍한 이유가 아니었다. 요셉이 그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셉이 자기 삶의 목적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며, 자신이 겪은 모든 시련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게 되었기 떄문이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당신을 향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각자의 삶 속에 주어지는 모든 일들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 있냐하면 결코 그렇진 못하다. 요셉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믿어야 한다. 그럼 요셉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경험하게 된다. 시련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위의 이야기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내가 제안한 '시련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나의 제안에 대해 분노하고, 나 자체를 비판하고 혐오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선택지들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선택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 한가지의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도록 허락해주라. 
이미 이 긴 글을 읽었으니 조금만 더 집중해주기를 부탁하겠다. (곧 끝난다.)

 '당신이 내릴 수 있는 모든 선택지 중, 당신의 삶을 가장 유익하게 이끌어갈 선택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읽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 역시 그의 첫 시련에 대해 비판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비판하는 것이 그에겐 당연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뭡니까. 도대체. 제게 보여주었던 꿈들은 다 뭐에요. 내 인생은 이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팔은
  너무 짧아서 나를 구원하시지 못하시는군요. 전 더 이상 당신에게 내 삶을 맡겨드리지 않겠습니다!'

 ...  그런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처음 구덩이에 꺼내어져 노예상인과 대면했을 때부터 그가 첫 주인을 만난 이집트로 가기까지 그는 줄곧 '불평'했을 것이다. 함께가는 다른 노예들에게 "난 너희와는 신분부터가 달라!"라며 자신의 상황을 거부했을 것이다. 고위관료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불평만 했다면 결코 갈 일이 없었겠지만) 왕의 면전에서도. 그는 불평하고 불평하고, 또 불평했을 것이다. 

 어디 13년 뿐이었겠는가. 평생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꼬여버린 인생에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자신의 형제들을 죽을 힘을 다해 저주했을 것이다. 

 당신은 이런 나의 가정에 동의하는가.
그러나 다행이도 그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했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했다.' '하나님의 선함에 대해 신뢰했다.' 그에겐 처절한 현실이었을 여러 시련들 속에서도 그는 이것들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은 그가 겪은 모든 시련 속에서 그와 함께 하셨다. (성경에서 위에서 얘기한 그의 시련들이 소개될 때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라는 말이 여러번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자, 나는 여기까지 말하였다. 이젠 당신이 선택할 차례이다. 
단지 나는 당신이 어떠한 선택을 했을지 무척 궁금하다는 사실만을 알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