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말씀 묵상: 절반의 순종과 절반의 제자도
2018.07.17.
Newport Beach 집
매일 아침 성경을 묵상한다. 사실 말이 좋아 묵상이지 읽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유야 많겠지만,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대한 몰이해와 기록된 말씀에 담긴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내가 근래 묵상 다운 묵상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기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예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문장들이 마음에 콕콕 박힌다. 게다가 팀 캘러 목사님의 ‘당신을 위한 사사기’라는 책을 보조자료 삼아 읽으니 묵상에 깊이가 생긴다.
순종 OR 불순종 ?
사사기 1장 1절을 보면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호와의 뜻을 직접 여쭈어 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에서 나는 이전까지 듣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나님, 하나님, 우리의 영적 리더이자 군대장이었던 여호수아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울까요?”
마치 어제까지 대화를 나누셨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유다 지파야. 네가 먼저 올라가라.”
이 음성은 대답일 수도 있지만 명령에 가깝다.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한 구원자의 명령. 그 명령 속에는 40년 광야의 눈물, 수많은 거역과 징벌, 훈련이 담겨 있었고, 거슬러 430년 애굽 종살이의 괴로움을 씻어 낼 약속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유다의 첫 반응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그들은 곧장 전투 태세를 갖추는 대신, 절친으로 보이는 ‘시므온’ 지파를 다급히 찾는다.
“시므온 지파야. 너 우리랑 같이 싸우러 갈래? 이번에 같이 가면 다음에 나도 같이 갈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유다 지파의 첫 번째 반응. 팀 캘러 목사님의 책을 읽기 전,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대개는 이런 불편한 포인트가 묵상을 위한 좋은 시작점이 되는 듯하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중에 마주한 낯선 문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거 유다 지파가 잘한거…야? 못한거야…?’ 감이 잘오지 않았다. 순종하기는 했으니 잘한 것 같고, 반면 함께 가자고 한건 불순종인듯도 하고… 아니, 지혜로운 판단으로 봐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이후 1장 18절에 보니 심지어 유다지파의 승리를 설명하는 구절도 있었다. 그럼 열매를 보고 판단하자면 '유다 지파는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팀 캘러 목사님의 판단은 ?
팀 캘러 목사님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신다. 책의 문구를 그대로 빌리자면 (하나님의 명령 이후) ‘거의 즉시 유다는 실패했다.’ 라고 단정하신다. 나아가 이것은 유다의 실패일 뿐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흐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보여 준다고 한다. 이것이 왜 명백한 실패가 되는 것일까.
명백한 실패의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유다지파의 행동이 ‘절반의 제자도’였기 때문이다. 절반의 제자도란, 순종은 하되 절반만 순종하는 제자도를 의미한다. 절반의 제자도는 마치 멋진 순종인 것처럼 쉽게 현혹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다지파의 승리가 그러했듯이 순종에 따른 ‘좋은 결과’라는 예쁜 포장지가 절반의 순종을 아름답게 둘러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반의 제자도’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실패로 규정한 근거는 무엇일까. 사사기 1장 19절, 다시 말해 순종의 좋은 열매처럼 보였던 유다지파의 승리 (18절) 바로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그 실마리가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사사기 1장 19절)
이 구절은 유다지파가 또 다시 현실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이 사사기 1장 전반부(~18절)에서 보여준 ‘절반의 순종’은 현실적인 어려움(19절) 앞에서 그 즉시 ’불순종’이 된다. 다시 말해 절반의 순종이란 ‘내가 납득한 순종’이며 절반의 제자도란 '내가 Okay할 수 있는 제자도’이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순종이 아니며, 제자도가 아니다.
두번째 이유, 유다 지파의 행동이 명백한 실수로 규정되는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의지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 역시 유다 지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흐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를 의지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들이 사사들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시대의 구원자로 선택 받은 사사들 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 대신 ‘능력자가 된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을 의지함과 그로 인한 타락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의 경향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왕을 구함으로써 영적 반역의 정점을 찍는다.
Ref. ‘절반의 제자도’와 ‘사람에 대한 의지’가 명백한 실패인 것처럼, ‘온전한 제자도’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의지’는 명백한 성공이다. 시간이 갈수록 타락 했던 사사기 시대의 백성들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었던 ‘사도행전’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사사기와 신약 사도행전의 선명한 대비는 우리들로 하여금 ‘절반의 제자도’와 ’온전한 제자도’, 그리고 ‘사람을 의지함’과 ‘성령을 의지함’이 보여주는 선명한 차이와 그 결과를 깨닫게 한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은 ?
하나님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보고 계실지..
스스로 보기에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제자도를 지닌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계획을 의지하는 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지..
사사기에 담겨 있는 ‘절반의 제자도’와 ‘사람에 대한 의지’를 신나게 나무라던 검지 손가락이 나를 보며 무안해 한다.
걱정되는 이 마음을 “그래! 십자가! 보혈! 그래! 걱정 끝!”이라며 그저 안도하기 보다는 잠시나마 그분의 시선으로 이런 나를 바라보고 싶다.
정복하지 못한 철병거로 인해 힘들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 곁에서 바라 보셨을 그 분의 마음으로 이런 내 삶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