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 3.19. 요셉에 대한 묵상

2012. 3. 19. 20:05Diary

 올해 성경 일독을 목표로, 매일 4장 이상의 성경을 읽고 있다. 성경을 읽으며 매번 놀라는 것은 이제까지 다 알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던 성경 속 이야기들이 날마다 새롭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디테일한 개입으로 인해 감탄하기도 하고, 모순 같아 보이거나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로 인해 궁금해하기도 하면서 정말 재미있게 성경을 읽고 있다. 

  특히 이전에 성경을 읽을 때와 다른 점은, 바로 Biblical Imagination, 즉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음 속에 이미지화하여 따라간다는 것이다. 마음 속의 시각화를 통해 성경을 읽다보면 마치 묘사가 잘된 소설을 볼 때 그러한 것 처럼,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성경을 읽으며 알게 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운영 방식들과 마음 속으로 간직했던 궁금증들을 이제는 조금씩이나마 블로그에 적고자 다짐했다. 생각보다 바쁜 학기 생활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쏟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역시 나의 비전을 향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작성하겠다.
 
 

 어제, 오늘 내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35장부터 45장, 요셉의 이야기 중 일부가 나와있는 부분이다. 위의 이야기 속에서도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먼저, 성경 속의 기자는 요셉에게 닥친 여러 불행들을 저술하면서, 요셉의 감정은 극도로 배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 물도 없는 구덩이 속에 자신을 빠뜨렸다. 그러나 요셉이 저항을 했는지 울부짖었는지, 혹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전혀 나와있지 않다. 그 뒤 42장,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나누는 형제들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 요셉이 어떠했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창 42:21) 그 뿐 아니다.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옥에 갇힐 때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사랑하는 아버지, 동생에게 인사 한번하지 못하고 떠나온 애굽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하였지만, 요셉 역시도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며 열심히 살았겠는가. 조금 잘되나 싶었는데, 이건 뭐 말도 안되는 모함으로 인해 이제껏 쌓아온 모든 신뢰관계며 명성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말이다. 감옥에 가면서 요셉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감옥에 왔다는 사실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인 자기 자신이 이런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이 그에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따졌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러했듯 성경의 기자는 요셉의 감정을 단 한 구절도 기술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 39:20~22)라고만 나와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지만 요셉 역시 자신의 억울함과 슬픔에 메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가 선 곳에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셉은 참 역경에 강한 사람이다. 흔히들 성공하는 사람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는 RQ, 즉 Resilient Quotient,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다. 삶의 초점을 ‘시련’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앞으로 해야할 것들에게 맞추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요셉은 매번의 상황 속에서 핵심이 무엇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놀라운 점은 성경의 기자의 기술 방식이다.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갇히게 되고,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기자는 요셉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기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대해 인간적으로 힘들어하는 부분은 한 구절, 한 단어도 나와있지 않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대해 옷을 내팽겨치고 뛰쳐나간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도 그러한 유혹은 정말 매력적이고 힘든 유혹이었음에도 말이다. (만일, 요셉이 그 유혹에 대해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이성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면 그는 옷을 버리고 뛰쳐나갔겠는가. 조곤조곤 설명하고 이 상황에 대해 주인에게 상담을 받거나 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의 사견일 뿐이다.) 또 바로 앞에 선 그의 감정은 하나도 나와있지않다. 그는 진정 강심장이었던가? 왕 앞에서 하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그의 그러한 감정에 대해 하나도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감정적 글쓰기의 배제’는 성경 기자가 지닌 개인적인 특성이었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요셉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요셉의 감정을 너무나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창 42:24),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창 43:30~3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45:1~2),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창 45:14)

  

  그렇다면 왜 성경기자는 시련 속의 요셉이 지닌 감정들은 배제하였던 반면, 형제들을 만났을 때의 감정들은 낯낯이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성경기자가 ‘핵심이 무엇인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 역시 성경에는 ‘핵심’만을 담고 싶어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셉의 시련을 표현하는 구절들을 보면, 요셉의 감정은 배제된 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는 구절이다. 그 구절과 함께 늘 등장하는 말들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꼐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창 39:2~4),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 39:20~22) 

  즉 요셉의 시련에서의 핵심은 ‘요셉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결과’였던 것이다. 어쩌면 요셉은 이러한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높은 회복탄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랬기에 그의 초점은 시련이 아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내 삶 속에서도 여전히 핵심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현상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얼마나 힘든가는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가의 여부에 따라 목숨과 모든 명예가 위태한 순간에도 나는 뛰어난 리더가 되어 세상이 놀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 외에도 느낀 바가 많은데, 위의 글을 작성하는 데만 한 시간 정도가 걸렸기 때문에 이후의 이야기들은 간추려 적도록 하겠다. (앞으로는 모든 느낀 점을 간추려 적어야겠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 학기 중 내게 주어진 학습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것...만 같다 엉엉) 

- 기타 깨달음

1.
 바로는 요셉에게 꿈의 해몽만을 요구하였으나,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해답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요셉은 바로가 진짜 원하는 것이 단순한 ‘꿈해몽’이 아니라, 그가 꾼 꿈으로 인해 가지게 되었던 ‘근심을 해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바로에게 감동을 주었고, ‘총리’가 될 수 있었다.

=> 나에게 주어진 일, 그 자체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 일을 시킨 사람의 속마음(핵심)을 읽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한다.

 2.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신분을 알지 못하였을 때, 자루 속에 들어있는 돈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창42:28) 그러한 계획이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 후에도 그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며 이렇게 두려워한다.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창43:18) 그러나 그 실제 요셉의 계획은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여 ‘물을 주어 발을 씻게하며 그 나귀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었다. 


=> 회의주의와 염세주의로 흐르던 철학의 사조를 뒤집었던 크리스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선행된 믿음”이 떠올랐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유익하게끔 계획해놓으신 일임을 믿자. 그러하지 못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혼이 떠날 정도로 떨며,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살도록 한다.

3.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정탐꾼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했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창42:21) 그들이 요셉을 해코지 하던 때가 요셉의 17세 때였고, 그들이 정탐꾼으로 몰린 때가 요셉의 39세 때였다. (계산을 해보면 나온다.) 즉 장장 22~3년 전의 일을 자신들의 위기 가운데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삶을 살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순간적인 유익은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죄책감’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죄책감이 치명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연단’을,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처벌’으로 오해하게끔 한다는 데 있다.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자신들이 두고 온 떡에 대한 ‘책망’으로 오해했던 제자들의 상황과도 같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되면, 연단의 기회, 가르침의 기회 속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얻지 못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자. 완전한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죄가 주는 순간적인 유익은 달콤해보이나, 그러한 죄 속에서 힘있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4.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며 한 말이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창45:5~7) 이 고백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자신이 총리됨의 이유를 그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사명)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루 아침에 ‘죄인’에서 ‘총리’가 되었지만, 힘있게 애굽을 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애굽 총리의 역할을 적어도 14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감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오바마가 나를 미국의 부통령으로 삼고 그 모든 실정을 내게 맡긴다면, 나는 단 1년이라도 제대로 국정을 운영해갈 수 있겠는가.)

=> 내가 선 위치를 명확히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삶의 비전을 안다는 것은 단지 ‘지인의 질문에 대답할거리’이상으로 큰 힘이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누구로 세우셨는가. 계속 여쭙고 고민하고 확신을 갖자.

5.  
요셉이 보디발의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은 떡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었고, 그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은 복직되었다. 요셉은 그에게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창40:14) 라고 신원을 요청하였지만 그는 만 2년 동안 요셉을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는 어떻게 이 사실을 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잊었다면 계속 잊고 있을 것이지 어떻게 2년 후에 생각해내었던 것일까. 나는 이 2년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훈련시킨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애굽의 총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은 요셉을 옥중의 사무 관리자의 위치에서 그를 훈련시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놀라운 것은 ‘요셉의 마음이 요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요셉이었다면, 술 맡은 관원의 복직을 보며 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내가 맡은 옥중의 일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하루하루 곧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만 품고 살았을 것 같다. 한 달, 두 달, 일 년이 지나도록 궁에서 연락이 없었다면 나는 술 맡은 관원을 원망했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2년을 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셉은 동요하지 않았다. 물론 잠시잠간은 위와 같은 기대와 고뇌와 실망을 하였을지 몰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것에 초점을 두고, 총리가 될 훈련에만 집중하며 2년을 보내었다. 

=> 정말 놀랍다. 그리고 정말 닮고 싶다. 내 뜻대로 무언가가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이루어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무언가 되지 않을 때는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로 믿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께서 내게 총리의 직분, 그 이상의 것들을 맡기시고 나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이라고 믿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 


  총 11장에 달하는 요셉 이야기의 일부만 가지고, 적은 글에 1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을 들였다. 글을 너무.. 길게 쓴 것 같다. 이렇게해서는 장기적으로 글을 쓸 수 없다. 내일부터는 짧게 요약해서 핵심만 간단하게 적어야겠다. 그래도 성경을 읽는 가운데 막연하게 들었던 깨달음들이 글로 정리하는 과정 가운데 더욱 명확해지고, 내 삶에의 적용점 역시 확실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깨달은 것만으로는 삶의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찾은 적용점들이 내 삶에 적용되고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갈 때 나는 더욱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성경에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성경에 다 담기지 않은 인물들의 상황과 그들의 감정들을 상상하다보면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시간 소요만 줄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화이팅.